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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대금과 임꺽정

by 월간 김창주 2021.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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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대표적인 관악기 중에 하나인 대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문: 기록이 많이 남아있나요?

답: 거문고와 같은 현악기는 주로 양반들이 연주를 해서 연주한 사람의 심정이 잘 기록되어 있는데요. 피리와 관악기에 대한 기록은 연주자 자신이 자신의 악기에 대해 기록한 내용은 극히 적고, 주로 글을 쓸 줄 아는 문사들이 대금을 연주한 사람에 대한 기록을 합니다.

 

문: 그러고 보면 악기를 연주한 사람에 따라 신분의 차이도 있는 것 같아요. 거문고는 선비, 대금이나 피리는 검객이나, 방랑자가 떠올라요.

답: 신분제 사회에서는 악기로 신분적 차이를 읽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관악기는 입으로 바람을 불어넣어야 되니까 폼이 안 나는데, 현악기는 멋지게 폼을 잡을 수 있는 특징이 있지요.

 

문: 그런 차이점이 있군요.

답: 과학적으로는 공통점도 있어요. 현악기나 관악기나 모두 둥근 원기둥에서 음악이 시작되는데요. 현악기는 속이 꽉 찬 원기둥 모양의 현을 줄을 튕겨서 소리를 낸다면, 대금과 같은 관악기는 속이 텅 빈 원기둥에 바람을 불어서 소리를 내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오늘은 속이 텅 빈 대금의 특징, 신화, 기록에 남아 있는 대금 명인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왔습니다.

 

문: 옛 책에는 대금은 어떤 악기로 기록되어 있나요?

답: 『삼국사기』에는 당시 대금의 악곡 수가 등장하는데, 그만큼 오래된 악기입니다. 피리라는 악기가 따로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편하게 단소, 대금, 태평소 등 공명악기를 통틀어서 피리라고 부르곤 하죠.

 

문: 고문헌에서는 피리와 대금을 어떻게 구분하고 있나요?

답: 세로로 연주하는 악기는 퉁소나 단소처럼 모두 소(簫)로 기록이 되어있고, 가로로 연주하는 악기는 횡적(橫笛), 횡취(橫吹) 또는 장적(長笛)처럼, 적(笛)으로 기록해서, 세로로 연주하는 악기와 옆으로 연주하는 악기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문: 그럼 가로로 연주하는 적(笛)종류의 악기들을 대금의 원형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가로로 연주한다고 다 대금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고, 대금의 음악적 특징은?

답: 대금에 청공이 있어요. 갈대 속에서 채취한 창호지처럼 얇은 청(淸)이 이곳에 붙어있는데, 청의 울림을 동력으로 대금의 부드러우면서도 굳세고 시원한 음색이 대금이란 악기가 갖는 특징입니다. 이 청에 의해서 흥겨움과 짙은 호소력 등이 결정됩니다.

 

문: 그러면 음색의 특징에 따라 다른 종류의 대금이 있을 것 같은데요.

답: 정악 대금과 산조 대금이 있는데, 정악 대금은 글자 그대로 궁중음악과 정악에 사용되고 산조 대금은 대금 산조나 민속무용반주 등에 사용됩니다. 대금은 국악에서 합주곡을 연주하기에 앞서 악기들이 대금에 음을 맞춰 조율을 합니다. 대금은 음정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서양음악에서는 이것을 오보에가 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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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신라시대 “만파식적”에 대한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을 것 같은데, 적이 들어가니까, 가로로 연주하는 관악기라는 것을 알 수 있네요.

답: 만파식적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등장합니다. 말 그대로 ‘만 가지 파도를 쉬게 하는 피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요. 앞에서 설명한 데로 적이란 한자가 쓰인 것을 봐서는 가로로 연주한 악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 초등학교때 배워서 줄거리가 가물가물한데, 간단하게 정리를 해주실래요.

답: 신라 신문왕(681~692)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감은사를 짓고 추모하는데, 바다용이 된 문무왕과 하늘의 신이 된 김유신이 합심하여 동해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냅니다. 이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연주하니, 적의 군사는 물러가고, 병은 낫고, 물결은 평온해졌다고 전해집니다.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사리장엄구, 보물 제1359호(국립중앙박물관)

문: 정말 그랬을까요? 어떤 의미일까요?

답: 이 설화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흩어져 있던 백제와 고구려 유민의 민심을 통합해 나라의 안정을 꾀하려 했던 호국 사상과 모든 정치적 불안이 진정되고 평화가 오기를 소망하는 염원이 담겨 있다고 해석을 합니다.

 

문: 일본이 자꾸 우경화된다고 하는데, 한국과 일본의 평화를 위해서, 독도에서 한국과 일본의 평화를 위한 대금(만파식적)연주회를 개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답: 이 신화가 주는 현재 우리에게 주는 교훈, 메세지가 ‘학문과 예술, 문화교류로 평화 지키자’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문: 만파식적이 아무리 좋아도 연주하는 사람이 실력이 좋아야 하는 법인데, 대금 명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나요?

답: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설화문학의 대가로 알려진 유몽인의  어유야담』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인데요. 임금의 친족이고, 옥적(옥으로 만든 대금) 연주로 이름이 나있던 단양현감이었던 이수라는 사람이 황해도 산골을 가다가, 산적에게 붙잡혀요. 호랑이에게 붙잡혀 가도 정신을 바짝 차리면 산다고, 요즘말로 하면 음악으로 산적을 힐링? 음악치료를 해주고 살아나옵니다.

 

문: 뭐라고 써놨나요?

답: “산골짝으로 수십 리를 들어가자, 채색 장막이 보이고, 수많은 무리들이 각기 공구와 병기를 가지고, 대장 한 사람을 옹위하고 있는데, 붉은 관을 쓰고, 비단 도포를 입고, 붉은색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가 바로 관군이 붙잡지 못한 임꺽정이었다” 여기에서 이수가 옥적을 연주하자, 임꺽정이 슬픈 표정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문: 임꺽정이 왜 울었을까요?

답: 그 이유는 “당시에 조정에서 임꺽정을 붙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데, 임꺽정도 끝내 잡힐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슬픈 곡조를 듣자, 처연한 마음을 이길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임꺽정은 이수를 다시 골짜기 앞까지 모셔다 주고 풀어주라고 합니다. 속이 텅 빈 대금이 임꺽정의 텅 빈 마음을 울린 것 같습니다.

 

문: 이수는 임금의 친족이니, 왕족인 것 같은데요. 대금을 연주한 악공의 이야기도 있나요?

답: 1891년 태어나서 1943년에 타계하신 김계선이란 분이 계신데요. 이 분은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수로 활동을 하는데요. 조선시대였다면, 궁중음악기관이었던 장악원의 악공이었던 셈입니다. 이 분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말년에 끼니를 잇지 못하던 가난한 신세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대금처럼 만인을 즐겁게 하는 악기는 속이 비어 있다.”고 말씀을 하셨어요.

 

문: 어떤 활동을 했는지 궁금하네요.

답: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1920년 8월에 경성에서 미국흑인음악회가 개최됩니다. 김계선 씨가 출연, 동서양의 조화를 느낄 수 있다는 기사가 보이구요. 크로스오버, 퓨전 음악은 이미 100년 전에도 실험되고 있었습니다. 1928년에는 잡지 『별건곤』에서 ‘조선 고악의 변천과 역대 악단의 명인물’이란 글에서 “김계선의 장적은 또한 속세의 독보다”라는 글이 보입니다. 

 

문: ‘독보적이다’라는 말 같은데, 그 인기가 어느 정도였나요?

답: 당시 경성방송국에서는 김계선의 대금 연주를 고정 프로로 정해서 생방송을 할 정도로 유명세와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1940년 6월에 “조선음악의 대향연”이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예술문화 보전 보급 향상과 아울러 그 기업화에 힘쓰려는 뜻에서 창립된 조선예흥사가 종로에 사무실을 내고 음악회와 전시회를 개최”하는데, 여기에서도 아악부원으로 참여를 하고 있습니다.

 

문: 음악은 타고나야 되는 것 같아요?

답: 1941년 4월호 잡지 조광』에 실린 김계선의 ‘나와 대금’이란 글을 보면, “나는 음악성이 남달리 있는지 어떤지 표현할 수 없습니다만, 자랑거리가 있다면 남의 곱절, 아니 몇 십 배 더 많이 대금을 불었다는 것뿐입니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라는 말을 남깁니다. 가장 아끼는 곡은 국악 합주곡인 평조회상 중 상령산과 대금독주곡인 청성곡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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