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파와 전주

2021. 5. 21. 22:01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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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금, 거문고와 함께 삼현으로 알려진 전통악기 향비파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비파는 2,000년이 넘는 긴 역사를 가진 악기인데요. 사찰에 가시면 사천왕 중 지국천왕이 이 비파를 들고 있습니다. 실제 크기는 통기타 크기와 비슷하거나, 조금 작고요. 모양은 표주박을 반으로 잘라 놓은 모양입니다. 기타나 비파와 같이 줄을 튕겨서 소리를 내는 악기를 류트계 악기, 또는 발현악기라고 합니다.

 

문: 가야금이나 거문고에 비하면 많이 생소한 것 같아요. 연주자들이 많나요?

답: 조선시대 악공 선발시험에서 기본적으로 비파를 연주할 줄 알아야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현악기로 삼현 중에 하나로 불리어졌지만, 1940년대를 마지막으로 비파 연주가 거의 단절이 되었습니다. 이때 악기를 만드는 법, 연주방법, 악보 등 많은 관련 된 것들이 사라졌습니다. 제가 찾아 본 바로는 1943년 9월 2일 경성방송국 선곡표에 비파 독주가 나온 것이 있었는데요. 1980년대 이후 악기 복원 사업이 있었습니다. 1990년대 이후에 한은영 씨가 중국에서 비파를 공부해 와서, 국내에서 비파가 다시 연주되기 시작했습니다.

 

문: 옛 기록에 비파는 어떤 악기였나요?

답: 고구려 음악에 이 비파가 공후(공무도하가, 하프와 비슷)와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이때는 비파를 현이 다섯 개라는 뜻으로 오현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오현은 다섯 줄의 현악기로 곧은 목을 가지고 있으며, 표주박 모양의 울림통을 가지고 있다. 이 오현이 통일신라로 전래되면서 새롭게 향비파로 불리어집니다. 『삼국사기』에는 통일신라시대 음악에 쓰인 세 가지 악기를 앞에서 말씀드린 삼현이라고 했고요. 향비파 음악은 212곡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선율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문: 중국과 우리나라도 비파가 있는데, 일본에도 전래가 되었나요.

답: 일본 왕실 보물 창고인 정창원에 두 대의 비파가 전해져 오는데요. 한국의 비파는 중국, 일본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거문고는 술대를 이용해서 현을 튕기는데요. 술대는 길쭉한 나무막대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기타의 피크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조선시대 음악책인 『악학궤범』에는 향비파의 술대를 잡는 법을 그림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중국이나 일본에서 비파 연주에는 술대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쉽게도 현재는 우리나라에서 연주되는 비파도 술대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어떤 이유로 거문고와 같이 술대를 사용했을까요?

답: 일부 학자는 거문고의 연주기법을 수용해서, 외래의 악기인 비파를 자주적으로 사용했다고 해석하는데요. 기타의 경우에는 삼각형 모양의 피크를 사용하는데, 피크를 사용하면 속주가 가능하고, 손가락으로 튕길 때 소리가 부드럽다면, 피크를 사용하면 소리가 더 다이내믹해지고, 리듬이 살아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현재 술대의 사용을 정확히 고증할 수는 없고요. 아마도 술대를 사용한 강렬한 연주가 있지 않았나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120년 만의 귀환, 미국으로 간 조선 악기」 특별 전시에 나온 비파(국립중앙박물관,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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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악공 시험에 비파 연주가 필수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212곡이나 비파곡이 있었고, 또 술대를 사용하는 우리만의 독특한 연주기법이 있었는데, 많은 것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서 아쉬운데요. 비파 연주의 명인에 대한 이야기는 혹시 있나요?

답: 17세기에 유행어가 있었습니다. 지극한 경지를 칭찬할 때 인용하는 말이었는데요. “송경운의 비파 솜씨 같구나”라는 말이 있었다고 해요. 이 이야기는 이기발이라는 당시 전주 출신의 양반이 쓴 「송경운전」에 전해져 오는데요. 송경운은 9살에 비파를 배우기 시작해서, 열두 살에 이름을 날렸다고 합니다. 사대부의 각종 연회에 불려 다녔는데요. 신기에 가까운 기교가 있어서 가는 곳마다 환대를 받았다고 하고요. 서울에서 인기가 많았던 송경운이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난을 피해서 전주에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책을 참고해 주세요.

 

전주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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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열두 살에 이름을 날린 천재 비파 연주가가 전쟁을 피해서 전주에 내려왔다는 말씀인데요. 전주에서는 어떻게 생활했는지도 기록되어 있나요?

답: 평소 비파 소리를 접하기 힘들었던 전주 사람들은 서울에서 비파 악사가 내려왔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집에 몰려들었는데요. 집이 늘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사람들이 찾아오면 가마를 메는 천한 사람일지라도 일을 멈추고 비파를 연주를 해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실컷 음악을 감상한 후에 비파를 내려놓았고, 반드시 노래의 법도를 갖추어 비파를 탔는데, 이렇게 삶을 20여 년간 지속한 송경운은 전주인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네요.

 

문: 어떤 음악을 연주했을까요?

답: 송경운 자신은 옛 노래를 좋아했지만, “음악이란 사람을 기쁘게 함을 위주로 하는데, 음악을 듣고도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사람에게 무슨 유익함이 있을까?”하면서 금조, 즉 유행하는 노래를 섞어 연주해 평범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구사하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73세에 타계하기까지 수십 명의 제자를 배출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문: 송경운 명인은 당시 전주의 어디쯤에서 사셨을까요?

답: 이기발이 전주의 서쪽에 있던 빙치, 우리말로 하면 얼음 고개에서 전주성 내에 복사꽃과 자두꽃이 가득 핀 풍경을 감상하다 송경운을 만납니다. 조선시대 전주에도 얼음을 보관하던 빙고장이 있었는데, 다가산 아래 있었어요. 아마도 빙치는 다가산으로 추측이 되고, 송경운은 전주성의 서쪽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어요. 지금의 서문 부근에 살았던 것 같고, 지금도 부근에 뜬금없이 기타 학원, 악기점이 있는데, 앞에서 수십 명의 제자를 배출했다고 했는데, 뜬금없이 있는 게 아니라, 그 내력이 있는 게 아닐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문: 당시 전주 풍경은 어땠나요?

답: 전주는 큰 도회지여서, 인물이 동방에 으뜸이지만, 백성들이 화려함을 숭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송경운이 이사를 온 이후로 비파 소리를 즐겨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또 완산의 옛 풍속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계를 하면서 서로 협동하고, 재물을 모아서 서로 돕는 일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문: 다음 시간에는 어떤 이야기?

답: 비파를 타고 실크로드를 건너볼까 생각 중인데요. 중앙아시아 타클라마칸 사막 그 뜻이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사막이란 뜻입니다. 이곳에 구자국이라는 사라진 나라가 있었고, 춤곡이 있었습니다. 구자악의 대표적인 악기 중에 하나가 비파인데요. 비파를 타고 사막을 건너서, 비파가 어떤 악기인지 좀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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