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여행으로 본 근현대

2021. 5. 30. 12:26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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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오늘은 수학여행에 대한 이야기 준비하셨다고요.

답: 1920년 11월 1일,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전주의 학생들이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수학여행을 떠난 신문기사를 있어서, 더 공부를 해봤습니다. 그냥 지날 칠 수도 있는 기사지만, 남북이 분단되기 전에는 기차로 평양에 갈 수 있었습니다. 

 

문: 그렇군요. 우리나라에서 수학여행이 처음 도입된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답: 수학여행의 제도적 도입이 문서상으로 확인되는 것은 1906년 9월 1일 학부령 제20호 사범학교령 시행규칙에서인데요. 수학여행지는 경부선, 경의선, 안봉선 등의 철도가 건설되면서 철로를 따라서 수행 여행지가 점점 확장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20년대에는 중등학교에서 수학여행이 일반화되기 시작합니다.

 

문: 그럼 1920년대로 가볼까요?

답: 1920년 6월 30일 동아일보 4면 기사입니다. 중앙학교 수학여행. 경성사립중앙학교장 최두선 씨는 직원 3인, 3~4년생도 40여 명을 동반하고 지난달 29일 전주에 도착하여 본지 국장 정준모 씨의 안내로 남고산성, 경기전, 한벽루 기타 각소를 견학하고 30일 오전 10시 30분 경편열차로 출발 귀경”합니다.

한벽루에서 본 풍경(2018)

문: 전주의 남고산성, 경기전, 한벽루를 들러보고 서울로 가는데, 경편열차는 무엇인가요?

답: 보통 성냥갑만하다고 비유할 정도로 일반 기차마다 작은 기차인데요. 당시 전주와 현재 익산에는 이 경편열차 선로가 있었고, 아마도 익산에서 일반 기차로 환승을 해서 경성에 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문: 전주로 수학여행을 온 기사를 말씀해 주셨고, 전주 학생들은 어디로 수학여행을 갔나?

답: (1922.6.26. 동아일보 4면) “전주고보생 수학여행. 전주고등보통학교 제2, 3학년 생도 구십사 명은 손균옥 교유 인솔 하에 지난 19일 오후 1시 대전에 내착하여 대전중학 대전공보중 (중략) 등을 역람 하고 20일 오전 1시 45분발 북행 차로 평양에 향하였는데 (중략) 24일 오후 전주에 귀착한다. (1922.10.31. 동아일보 4면) 각교 수학여행. 호영강습생 수학여행. 전주호영강습원 생도 80여 명은 3일간 예정으로 전북 정읍군 내장과 전남 장성군 백양사 등지에 수학여행차 10월 28일 오전 7시 40분발 열차로 출발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군산항을 견학한다더라.

 

문: 정읍 내장은 내장산을 말하는 거죠?

답: 당시에 호남선이 놓이면서, 관광지로 부각되는 모습이 보입니다. 정읍역에서 내장산까지 자동차를 운행하고, 내장산 탐승단을 모집한다고 광고도 있는데요. 내장사 앞까지 관광이 너무 성행한다. 자제하자는 기사도 있습니다.

 

문: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가서 그랬던 것은 아니겠죠.

답: 물론이죠. 당시에 이런 기차와 자동차를 타고 관광을 하는 사람이면 상당히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1922.11.3. 동아일보 4면) “전주신흥교생 수학여행. 전주사립기독신흥학교 고등과 생도 80명은 교감 박정근 씨 인솔 하에 정읍군, 장성군 백양사, 광주군 등지로 보통과 생도 육십 명은 교사 (중략) 이경혁 씨의 인솔 하에 전주군 위봉사, 군산항 등지로 수학여행차 10월 31일 오전 7시 40분 발차로 각각 출발하였다더라.

 

문: 군산항에도 가고, 인솔한 선생님의 이름이 기사에 나오네요.

답: 요즘 군산이 근대문화유산을 잘 활용해서 새로운 관광지로 부각되고 있는데요. 초기 수학여행은 근대 시설물과 고적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경혁(李卿赫: 1892 ~ 1922)은 신흥학교 교사로 전주에서 서양음악을 가르치며 대중화시킨 분입니다. 현재 이경혁에 관한 자료는 전주서문교회에 남아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찾을 길이 없어요. 증언에 의하면 말씀도 잘하시고, 노래, 작문, 작곡 등 다재다능한 분이셨다고 해요. 또 서문교회에서 전해오는 교회 가극단 사진이 있는데, 이 여학생들을 가르친 분이기도 합니다.

 

문: 근대 문물이라면 일제가 만든 시설에 대한 여행일 텐 데, 목적이 있을 것 같다.

답: 당시 수학여행의 목적은 충군애국과 근대 문물의 견학을 통한 일제의 동화정책이었습니다. 일제는 역사 고적지를 탐방하는 수학여행이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할 것을 염려하여 통제 정책을 취하기도 했습니다. 1920년대 들어와서 중등학교에서 수학여행이 본격화되면서, 일선 학교에서는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가는 것을 체계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하기도 합니다.

 

문: 그렇다면 해외로 나간 수행여행에 대한 기사도 읽어 볼까요?

답: (1923.5.22. 동아일보 8면) “전주고보생 수학여행. 전주관립고등보통학교 4~5학년 생도 53명은 지난 18일 오전 11시에 떠나는 열차로 남만주 봉천 대연 등지 각학소를 견학 코저 출발 (1925.5.19. 동아일보 5면) “전주고등보통학교 1~2학년생도는 부산 방면으로, 3~4학년 생도는 경성, 인천을 거쳐 원산 금강산 방면으로, 4~5학년 생도는 일본 방면으로, 각반 교사의 인솔 하에 15일 오후 8시 반 전주역발 열차로 각각 수학여행을 떠났다.

 

문: 당시 수학여행을 갔다 온 학생들의 증언도 있나?

답: 당시에 학제가 중학교 고등학교로 나눠져 있지 않고 중학교로 5년제 또는 6년 제로 나누어져 있는데요. 1학년 때부터 저금을 해서 그 돈으로 5, 6학년 때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가는데,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가서 여학생들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람들이 아무리 많아도 밥상을 전부 독상을 주었다는 점과 학생들은 당시 일본 문명에 대한 놀라움에 대한 증언들인데요. 지금처럼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택시가 줄을 서있었다는 증언들입니다. 일제에 대한 이율배반적 정서가 여기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 그걸 보고 학생들이 기가 죽었을 것 같다.

답: 꼭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당시에 우리나라에서 수학여행을 간 학생들이 일본어를 너무 잘해서 일본 어느 지방에서 온 학생들로 착각을 하는데, 그걸로 놀리는 장면도 있고, 또 무시당할까 봐 우리나라에서 왔다는 것을 끝까지 숨기는 장면도 있습니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 수학여행은 국내 도시 중심에서 일본과 만주로 여행지가 확대되었고, 1937년 중일전쟁 이후로는 성지 참배 중심의 수학여행이 실시됩니다. 일제의 동화정책과 자본주의적 소비경제로서 관광의 모습이 보입니다.

문: 당시 국내 수학여행지는 주로 어느 곳이었는가?

답: (1926.10.23. 동아일보 5면) “전주신흥교생 수여. 전주신흥학교에서는 동교생도를 네 조로 나누어 수학여행을 한다는데 고등과 전반은 오는 28일 출발하여 충남 명산인 공주 계룡산의 풍경을 구경하고 백제 고도인 부여의 명승고적을 일일이 답사한 후 30일에 귀교할 예정. 보통과 5~6학년생은 호남 금강인 정읍 내장산으로 4년생은 전주 봉서사와 위봉사 양 사찰로 2~3학년생은 금산사로 1학년생은 완산팔경의 하나인 남고산성으로.” 수여는 수학여행의 줄임말입니다.

 

문: 해방 후 수학여행 풍경은 어떤가?

답: 사실 해방 후에는 수학여행이 활발하게 시행되어서, 특이한 기사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이후에는 사고 기사, 경제 문제 등이 눈에 띈다. (1963.10.23. 경향신문 7면) 부형을 울리는 수학여행 아이들 소풍 보내고는 싶지만 1,600원짜리까지, 힘에 겨워. 단풍관광 시즌을 맞아 전북 도내 각 중고교는 갑자기 수행여행 붐이 일어나 최고학년인 3학년뿐만 아니라 하급생인 1, 2학년까지도 동원되고 있어 넉넉하지 못한 학부형들은 노자 마련에 울상을 하고 있다. 학생들의 행선지는 주로 제주도가 가장 많고 충청 속리산, 경주, 부여, 멀게는 서울 등지인데 보통 3일간에서 6일간 걸리는 장기 여행에 학생은 1인당 300원부터 1,600원의 여비를 부담하고 있으며, 이에 개인 잡비를 포함하면 학부형들의 부담금액은 무려 2,000여 원에 달하고 있다.

 

문: 2,000원이면 지금은 큰돈이 아닌데, 당시 물가가 궁금하다.

답: 1963년에 쌀 한 가마가 2,000원이었고, 설렁탕 한 그릇이 40원이었습니다. 2,000원이면 설렁탕 50그릇 가격입니다. 이후 수학여행은 주로 사고 소식인데, (1967.10.10. 매일경제 3면) 무용회에 참가하지 않고 수학여행을 했다는 이유로 무용반 여학생의 머리를 담임선생이 삭발 한 사건으로 물의 일으키고 있다. (1971.10.13. 동아일보 1면) 남원역 구내에서 열차 충돌로 수학여행 어린이 참사(사망자 22명) (1973.) 수학여행 국민교생 가스 중독 숙박업소 아궁이 점검. 이밖에도수학여행에 대한 수요는 늘었지만 안전이 뒤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1세기에도 여전한다면 왜 그럴까요? 

 

문: 요즘은 수학여행이 많이 변화한 것 같다.

답: 1990년대에는 대학생들의 해외 배낭여행과 함께 고교생들의 해외 수학여행도 늘고 있는 추세란 기사가 있습니다. 1997년부터는 교육 당국에서 성인들의 유람성 관광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학생들의 수학여행이 체험 중심의 테마별 현장학습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개선안은 문학기행, 역사기행, 문화인물기행 등 테마별로 여행을 실시합니다. 목표지를 2~3곳으로 나눠 한꺼번에 너무 많은 학생들이 이동함으로써 생기는 번거로움을 줄이도록 하는데요. 요즘은 전체 학년이 아니라 반 단위로 수학여행을 가기도 하지만, 일선 학교 교사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수학여행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인데요. 1920년대부터 있었던 수학여행의 모습을 보면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월간 김창주,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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