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愛(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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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화 꽃무릇 아래
신라 경문왕의 침선장은 죽기 전에 대나무 숲을 찾아갔다. 대나무를 베고 산수유를 심어 놓은 곳에 더듬더듬 기던 애벌레 스스로 껍질을 벗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비를 보고 속삭였다. 붉은 껍질을 벗겨내어 숨어 있는 날개를 찾아줘. 하얀 속살을 베어 먹어, 남김없이 제 살을 모두 도려내어 똬리를 튼 껍질만 남긴 사과 쐐기풀로 자라 가시 돋은 옷이 되어 날개를 숨겨 주었다. 백조는 사람이 되어 대나무 숲에 들어갔다. 이야기를 삼킨 대나무 바람이 불면 스스스사사사하악 상사화 꽃무릇 아래 스스로 껍질을 벗어도 날 수 없는 뱀이 잠에서 깨었다. [월간 김창주, 2021]
2021.10.11 -
시월애와 건축학 개론
『시월애』(2000)와 『건축학 개론』(2012)은 비슷한 점이 많은 영화다. 제목부터 보면, 둘 다 어려운 한자어다. 한글에 괄호 넣고 한자가 쓰여있던 마지막 세대의 사랑 이야기다. 시월애(時越愛)는 10월의 사랑이란 뜻이 아닐까, 언뜻 생각이 들지만, 시간을 초월한 사랑이란 뜻을 담고 있다. 건축학 개론(建築學 槪論)이란 단어 역시 어려운 한자어다. 20세기 대학에 입학하면, 이런 개론 수업들을 처음으로 수강했다. 개론은 어떤 뜻일까?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내용을 대강 추려서 서술함. 또는 그런 것."이란 뜻풀이가 되어 있다. 뭔가 쉽게 알려줄 것 같지만, 대강 추린다는 말처럼 대상의 본질에 대해서 아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첫 번째 공통점 영화의 제목이 둘 다 한자어다. 時越愛와 建築學 槪論 마치..
2021.09.13 -
미끄럼틀
저녁 6시 30분. 기다리던 사람은 오지 않는다. 같이 미끄럼을 타던 사람은 더 이상 이곳에 오지 않는다. 미끄럼틀을 보고 있으면, 어느 약수터의 전설이 생각난다. 이 약수를 한 잔 마시면 10년이 젊어지고, 두 잔을 마시면 20년이 젊어지오. 욕심을 내 세 잔을 마시면, 도로 제 나이가 되오. 난 미끄럼을 타고 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전설처럼 나는 도로 제 나이가 되지 않는다. 텅 빈 미끄럼틀을 보면, 사람은 늙어 간다. 놀이터엔 노인이 된 줄 모르는 아이들이 미끄럼을 타고 있다.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며 [월간 김창주, 2021]
2021.09.06 -
만복사 저포기
저포 놀이가 맺어준 사랑 이야기인데요.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나오는 「만복사저포기」입니다. 만복사에서 저포를 놀이를 한 기록이란 제목의 소설입니다. 문: 저포 놀이가 뭔가요? 만복사는 절 이름인가요? 답: 저포는 나무로 만든 주사위를 던지며 노는 놀이인데요. 윷놀이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만복사는 현재는 남원에 있는 절터로 만복사지를 말합니다. 말 그대로 주춧돌만 남아 있는 황량한 절터인데, 이야기를 듣고 나시면, 꼭 한번 가게 되실 거라고 확신합니다. 특히 겨울에 가면 묘미가 있습니다. 문: 황량한 절터를 찾을 정도로 이야기가 감동적이란 말씀인데, 시작해 볼까요. 답: 남원에 만복사 동쪽에 장가를 못 간 양생이란 사람이 살았어요. 하는 일이 달밤에 나무 아래에 서성거리며 시를 짓는 게 취미인 청년인데,..
2021.07.07 -
지렁이 울음소리
『지렁이 울음소리』 박완서 작가의 단편집입니다. 안톤 체호프의 유머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마성, 넷플릭스의 『블랙 미러』를 보는 느낌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블랙 미러』가 가까운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면, 『지렁이 울음소리』는 가까운 과거의 『블랙 미러』 같은 이야기란 생각이 들었어요. 단편 중 「도둑맞은 가난」이란 작품에서 그런 생각이 더 들었어요.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고등어를 굽는 여자. 여섯 집이 다 붙어 있어서, 기름진 고등어를 구우면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여자는 그들에게 복수하듯 지글지글 고등어를 굽습니다, 환풍도 되지 않는 곳에서. 코에서 고등어 비린내가 나는 것 같아요. 여자의 사랑은 이랬습니다. 남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나목」은 싱그러움과 비참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습니다. 아..
2021.06.10 -
귀신의 변주곡
귀신의 정의 “기억이 우리를 정의하는 것처럼 기억에 집착하지만, 우리를 정의하는 것은 행동이다”라고 말하는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는 미래사회를 다룬 SF영화 같지만, 실은 사회의 부조리와 싸우는 처녀귀신의 이야기다. 영화는 내내 Ghost란 무엇인지 묻고 있다. 귀신과 유령, 정령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사전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면 귀신은 “사람이 죽은 뒤에 남는다는 넋”이고, 유령은 “죽은 사람의 혼령” 또는 “죽은 사람의 혼령이 생전의 모습으로 나타는 현상”이며, 정령은 “만물의 근원을 이룬다는 신령스러운 기운” 또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사전 상의 의미로 각각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기는 어려워 보이는데,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Ghosts of War ..
2021.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