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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와 아지노모도
지는 인류무형문화유산 지는 김치의 방언이다. 2013년 12월 아제르바이잔에서 김치와 김장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네스코는 김치가 한국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전해 오는 음식이고, 한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해온 음식이라는 점, 김장을 통해서 공동체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해외 한인들 역시 김치와 김장문화를 지켜나가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과 소속감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했다. 어렸을 때 김장이 끝나면 김치를 들고 이웃집에 심부름 갔던 것, 장독을 땅에 묻고 저장해서 한 겨울에 꺼내온 김치를 맛있게 먹던 기억이 있다. 1970년대에는 직장에서 김장보너스를 주기도 했다. 요즘은 가족해체 시대에 식구들이 모두 참여하는 김장문화 진작을 위해 국가차원에서 김장 ..
2021.11.03 -
곶감의 이율배반
곶감과 호랑이 곶감과 호랑이, 자동차 관광으로 일제강점기 전주를 상상(재구성) 해 보았다. 1929년 8월 한낮에 전주군 이동면 노송리에 큰 호랑이가 빈번히 출현하였다. 곶감 때문일까? 호랑이는 동리 사람들에게 쫓겨 기린봉으로 도주한다. 1921년에 포획된 대호(大虎)의 무게가 200관이 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곶감과 자동차 관광 1923년 6월에 필명 월봉생(한기악, 1898~1941)의 대아저수지 기행문이 있다. “오전 9시 30분 이리역(현 익산역)에서 13대의 자동차에 분승하여, 전주군 동상면 소재 대아저수지를 답사하기 위해 출발했다.(중략) 어젯밤 세찬 비에 요철이 심한 삼등 도로를 달려 자동차 고장이 빈번했지만, 초화(草花)와 바람이 상쾌했고, 미륵사지와 왕궁리오층석탑을 지나(중략), 삼례..
2021.11.02 -
전주 미래유산
미래유산의 차별성 서울시는 미래유산을 ‘근현대 서울을 배경으로 다수 시민이 체험하거나 기억하고 있는 사건, 인물 또는 이야기가 담긴 유·무형의 것으로서 서울특별시 미래유산보존위원회가 미래세대에 남길 만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 것을 말한다. 다만, 「문화재 보호법」에 따라 지정·등록된 문화재는 제외’라고 규정하고 있다. 전주시의 미래유산 정책 역시 이와 같은 기조(基調)를 공유하고 있다. 지정문화재, 등록문화재와 비교하여 미래유산의 제도적 차별성은 시민 스스로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기억과 감성을 발견, 또는 그것이 담긴 유·무형의 문화유산을 발굴·보존·관리·활용까지 시민주도의 자발성에 있다. 또한, 등록문화재가 50년 이상을 기준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기간 이전에 서울시의 난개발로 멸실 또는 훼손되는..
2021.10.29 -
시와 도시락
배고픈 지갑 “자네는 배고픔이 뭔 줄 아나?”라고 물으며 일제강점기를 회상하던 전주 토박이 어르신의 물음에 도저히 그 답을 상상할 수 없었던 기억이 있다. 김제에 가면 아리랑문학관이 있다. 전시실 2층에 소설가 조정래의 지갑이 하나 놓여 있는데 이런 설명이 붙어 있다. “젊었을 때 한 번도 배부르게 해주지 못한 지갑” 그저 그런 주글주글한 지갑인데 내 눈을 꽤 당겼다. 난 배고픔은 모르지만 배고픈 지갑에는 쉽게 공감하는 세대다. 급식의 시작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의미의 급식은 1953년 외국 원조에 의한 구호급식의 형태로 시작한 학교급식을 그 시작으로 보고 있다. 1958년에는 국립 중앙의료원에 최초로 영양과가 설치되면서 환자를 위한 병원급식이 실시되었다. 사업체 근로자들을 위한 급식은 1960년 초에 경..
2021.10.27 -
이별의 푸가
이별 뒤의 침묵은 둘이다. 나의 침묵과 그 사람의 침묵. 나의 침묵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포화 상태다. 나는 그 사람에게 말하고 싶다. 전화를 걸고 싶고, 문자를 보내고 싶고, 메일을 전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그 말들에게 스스로 금기를 내린다. 안 돼, 그러면 안 돼, 그건 너의 약속을 배반하는 거야. 그건 그 사람을 더 아프게 할 뿐이야... 하지만 또 하나의 침묵이 있다. 그건 그 사람의 침묵이다. 그 사람이 닫아버린 침묵의 문 앞에서 나는 나의 침묵을 부둥켜안고 나날이 서성인다. 혹시 전화가 오지 않을까. 문자가 날아들지 않을까... 하지만 나의 침묵이 열리지 않는 것처럼 그 사람의 침묵도 열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단 하나 허락된 말하기를 배운다. 그건 모놀로그다. 잘 지내나요. 아무 일..
2021.10.23 -
입체영화와 덕진공원
입체경과 입체사진 1955년 6월 27일 전주도립극장에 입체영화를 상영할 수 있도록 시설하겠다는 기록이 있다. 1955년이면 벌써 60년도 더 된 일이다. 입체영화는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을까? 입체영화는 1935년 프랑스의 루이 류미엘옹이 입체영화에 성공했다는 해외기사로 국내에 소개된다. 입체영화의 과학적 원리가 함께 소개되어 있다. 이 보다 앞선 최초의 입체영화는 1922년 개봉한 「파워 오브 러브」라는 영화인데 사랑의 힘으로 번역할 수 있다. 19세기에 이미 서구에서는 입체사진이 발명되기도 했다. ※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책을 참고해 주세요. 전주미학 전주미학 www.aladin.co.kr 백설희와 토키 20세기 초에 이미 입체영상으로 상업영화가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38년 2월 8일 ..
2021.10.20